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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부정공>돈서재중건기(敦舒齋重建記)
敦舒齋重建記 昇平治東九土里負丙面壬之原有崇四尺鬱然若斧堂者進士月川趙公之幽宅也而夫人洪氏附焉羨門之下甞有丙舍爲齊明裸將之所而講敦宗舒倫之方矣値年前反亂未免回祿而先輩經始之原委綢繆之賢勞杞宋無徵嗚呼惜哉后孫東漘爲是之慨協議群宗重建是閣而食焉而思寤焉而慮不憂其身之勞而憂齋之不成左周右旋手足胼胝而始于丙申而落于丁酉棟宇堂室奂然復新芬苾之虔奉雲仍之講睦綽有餘扁其楣曰敦叙齋咸謂記事之文不可闕俾敏植而文之第念公以忠信之姿慷慨之志抱經綸之才庶可有爲於當世而薄試洋宮以未克展所蘊之萬一遊於畸翁鄭公之門得聞尊攘之大防矣當仁廟丙子北虜猖獗天綱之斁絶迫在朝夕公奮不自抑倡義擧勇行至清州聞和議成痛哭而歸賦詩一絶曰慷慨心中事空餘老此身春秋無地讀誰識大明人尊周田心漢之義凛凛然於詞意之間其秉執之高於斯可見矣遂杜門鏟跡終無駭眼惑志於聲色芬華之地俛而讀仰而觀涵泳於編章蠡魚之餘矣年未強仕而便生沒於一上舍而止其才器蓄而未試然性潭宋先生表公墓曰南鄉之所誦慕久而不己公之所修者果何而見譽於長德至此哉盖所植者名節所執者尊攘宜乎以眇然之身爲當時望重也甞聞根固者條暢源深者流潔爲公後承者以聿修祖德以立其本小大百行無忝所生然後先祖之靈其將曰予有后矣登斯齋肅然如聞警咳之聲優僾如見著存儀心祖之心法講祖之毅節俾祖之遣風餘韻永垂光于百世則將遐祉于無窮矣后孫禎勲以書速余文而將命而來詳道是役顚末者容勲其名也 歲在戊戌仲春既望 傍裔 敏植 記 돈서재중건기(敦舒齋重建記) 승평부 동쪽 구토리(九土里) 부병면(負丙面) 임좌언덕(壬之原)에 있는 四척 높이의 장엄함이 부당(斧堂) 같은 자는 진사 월천(月川) 조공의 유택인데, 부인 홍 씨(洪氏)를 부장하였다. 묘소 아래에 재각이 있는데 재계하거나 명천할 때 쓰기도 하고 종의를 돈독히 하고 천륜을 펼 처소로 사용하더니, 연전의 반란 때 화재로 소실되어 선배의 경시(經始)한 근원과 규획(規劃)한 착한 노고를 증거할 수 없으니 아! 아깝도다. 후손 동순(東漘)이 이를 분개하여 여러 종친과 이 제각을 중건하기로 협의하고는 먹으면서 생각하고 자면서도 염려하며 몸의 노고는 근심하지 않고 재각이 낙성하지 못함만을 근심하여 손이 깨지고 발이 부르트도록 좌우로 주선하여 병신년에 착공하여 정유년에 낙성하니, 기둥과 처마 당과 방이 빛나게 다시 새로와 선영 향사와 자손의 강목(講睦)이 정숙하게 여유가 있었다. 그 문지방에 돈서재(敦舒齋)라 현판을 걸고 그 사실을 기록하여 걸어 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민식(敏植)으로 하여금 쓰라 하므로 다시 생각하니 공이 충신(忠信)의 자질과 강개한 뜻으로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세상에 쓰였더라면 무엇인가 보람이 있었을 텐데 겨우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싸인 포부를 만에 하나도 펴지 못하였다. 기옹 정공(畸翁鄭公)의 문하에서 노닐며 중국을 존숭하고 이적(夷狄)을 물리칠 방비책을 들어 왔는데, 인조(仁祖) 때 병자년(一六三六) 일을 당하여 북방 오랑캐가 득세하니 천지에 三강과 五륜의 단절이 조석에 달렸으므로 공이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고 분발하여 의병을 불러 모았는데 청주에 이르러서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서는 한 구절을 읊었다. 끊어 오르는 이 내 마음 때문에 慷慨心中事 남은 몸이 속절없이 늙어가네. 空餘差此身 춘추를 읽을 곳이 없으니 春秋無地讀 누가 대명 사람을 알리오 誰識大明人 주나라를 높이고 한 나라를 생각한 뜻이 말과 글 사이에 늠름하게 엿보이니, 그 절행의 높이를 보겠도다. 마침내 문을 막고 자취를 감추어 종내 성색분화(聲色芬華)한 곳에 눈을 돌리지 않고 몸을 구부려 읽고 우러러 보아 좀먹고 남은 문장을 엮으며 은거하였다. 나이 四十세가 못되어 문득 한 가지 상사(上舍)로 별세하고 그 재기를 시험하지 못하였으나 성담(性潭) 송 선생이 공의 묘도에 표하되 남방 고을 사람들의 송모(誦慕)한 바가 오랫동안 끊이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니 공의 닦은 바가 과연 어떠하였기에 장덕(長德)의 칭송을 이렇게 받았단 말인가. 대개 심은 바는 명덕과 절의요, 붓 잡은 것은 존주양이(尊周攘夷)이니, 작은 몸으로써 당시 망중(望重)이 된 것이 마땅하도다. 일찍이 들으니 뿌리가 굳은 것은 가지가 무성하고 근원이 깊은 자는 흐름이 깨끗하다 하니 공의 후손 된 자 스스로 선조의 덕을 닦음으로써 그 근본을 세우고 작고 큰 백 가지 행실이 소생을 욕되게 함이 없는 연후에 선조의 신령이 가로되 『내가 후손이 있다 할 것이다. 이 재각에 오른 자는 공숙하게 경계하고 침 뱉은 소리를 들은 것같이 하고 어슴프레 나타나 계신 의용을 본 것같이 하여 선조의 마음을 마음하고 선조의 굳센 지절을 익혀 선조의 유풍여운(遺風餘韻)으로 하여금 길이 백세에 빛을 드리우게 한즉 장차 행복이 무궁할 것이다.』 후손 정훈(楨勳)이 서자(書字)로 나에게 글을 청하고 명을 가지고 와서 자상히 역사의 전말을 말한 자는 용훈(容勳)이었다. 방예(傍裔) 민식(敏植)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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